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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ssay/(2) Document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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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장(영결식)이 열리기 전인 7월 5일부터 8일까지 약 4일간 8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정치인, 교수, 학생, 일반 시민 등 온 국민이 이한열의 죽음에 슬퍼했습니다.

 

1987년 7월 8일에 열린 집회에 참가한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의원과 주변 학생들의 모습.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촬영 : 서울 특파원 출신의 대만정치대 한국어과 교수 주리시 朱立熙)

학생회관 1층에 마련된 빈소 외에도 전국의 대학생들은 연일 집회를 열며 경찰과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6일 오후에는 연세대, 고려대 등 전국 대학생과 시민 5천 명이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의 죽음에 임한 비상 학생총희>를 열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영안실에 조문을 온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 김신묵 여사. 이한열의 죽음은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만의 슬픔이 아니었다. 온 국민이 이한열의 죽음에 슬퍼하며 전두환 정권을 규탄했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우현과 우상호 의원 그리고 주변 학생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 내용이 적힌 취재보고서. 출입처와 취재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출처 : 동아대학교 학보사)

 

여기서는 부검 결과, 장례 절차 등 제반 사항에 대해서 토론했는데 경찰은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도 최루탄을 난사해 20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주위의 시민들이 “한열이를 두 번 죽인다”, “경찰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는 등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가 기증한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당시의 주보.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영결식이 있는 7월 9일, 추모객들은 새벽부터 연세대학교에 모여 독재정권 타도와 한열이를 살려내라며 소리쳤습니다.

 

새벽 6시, 이한열의 유해는 만화사랑 회원 16명과 경영학과 동기 24명 등 모두 40명에 의해 운구되었습니다.

 

이한열 열사 시신을 태운 운구차가 연세대학교 정문을 빠져나가는 모습.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열이를 살려내라!

 

한열이는 부활한다!

 

살인정권 물러나라!


 

오전 7시,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 국민장>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대학생과 단체가 플랜카드, 깃발을 들고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 모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왔는지 정문 앞 굴다리 철길에도 사람들이 올라갔고 모인 시민들로 차도엔 버스가 다닐 수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오전 9시 40분 수색역에서 신촌역으로 달리던 교외선 운행이 10분 동안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연세대학교 앞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굴다리 앞 차도와 교외선 철길에도 사람들이 나와 추모를 하고 있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촬영 : 서울 특파원 출신의 대만정치대 한국어과 교수 주리시 朱立熙)


“하늘과 땅과 산천초목마저도 그 뜨거운 슬픔을 삼키지 못하여 오열을 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 땅의 참된 민주주의 의승리를 위하여 스물 한 살의 꽃다운 청춘을 바친 한 젊음을 마지막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 불토정토구현 전국 승가회 공동의장 지선 스님

 

“민중의 하나님, 우리는 이제 한열이를 당신에게 맡기옵니다. 당신이 이 땅에서 사랑하셨듯이 아버지 나라에서 편히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민중을 사랑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지만 끝내는 승리하신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고 김세진 열사의 어머니, 이순정 씨의 추모기도


1987년 7월 9일 오전 7시에 열린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 추모 행렬이 얼마나 길었는지 버스, 지하철이 모두 멈춰섰다. 이 날에만 총 100만 명이 모였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윽고 전날 가석방으로 풀려난 시국 관련 수감자 367명 중 한 명인 문익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이 조사를 했다.

 

 


“전 나이 일흔 살이나 먹은 노인입니다. 이젠 살 만큼인생을 다산 몸으로 어제 어제 풀려나와 보니까 스물 한 살 젊은이의 장례식에 조사를 하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까 백기완 선생도 지난밤 한참을 못 잤다고 했지만 저도 한참 못 잤습니다. 너무 너무 부끄러워서. 왜 나왔던가...

 

어제 저녁에 여기서 (가석방으로 풀려난 것을 기념하여)박수를 치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내가무슨 면목으로 당신들의 박수를 받을 것이냐?

 

밤을 꼴딱 새면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많은 열사들의 이름이나 목이 터져라 부르고 들어가려고 나왔습니다.

 

모두 40명 된다고 하는데 제가 25명의 이름 밖에 몰라서 25명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빠진 이들이 있다고 하면 제가 다 부른 다음에 그 가운데서 누구나 일어나서 불러주세요.

 

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김태훈 열사여-! 황정하 열사여-! 김의기 열사여- ! 김세진 열사여- ! 이재호 열사여- ! 이동수 열사여- ! 김경숙 열사여- ! 진성일 열사여- ! 강상철 열사여- ! 송광영 열사여- ! 박영진 열사여- !

 

광주이천여 영령이여-! 박용만 열사여- ! 김종태 열사여- ! 박혜정 열사여- ! 표정두 열사여- ! 황보영국 열사여- ! 박종만 열사여- ! 홍기일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 오동근 열사여- ! 김용권 열사여- ! 이한열 열사여-!

 

- 문익환 목사 /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영결식에 찍힌 이한열 열사의 부모님. 아직도 믿기지 않는 표정이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두환이, 노태우 살인마! 살인마는 물러가라! 한열아, 한열아! 다 이제 풀고 가라. 이 많은 청년들이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줄 거야. 안 되면 엄마가 갚을란다. 한아, 가자, 우리 광주로 가자!

 

-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이한열의 죽음에 공감한 시민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한열을 직접 보기 위해서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신촌에 모여 연세대학교 입구부터 신촌로터리(현재의 신촌역 부근)까지 가는데 약 1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그 좁은 시청 앞에 약 100만 명이 모였다. 그런데도 경찰은 시위대에게 '질서'를 이유로 최루탄을 발포했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촬영 : 서울 특파원 출신의 대만정치대 한국어과 교수 주리시 朱立熙)


"재수를 위해 1985년 초 상경한 이래 2년 반 동안 이어진 짧은 서울 생활을 마감한 이한열은 그렇게 어머니의 회한을 안고 광주로 가는 마지막 여정에 올랐다.

 

이한열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광주 땅에, 그가 그토록 안타깝게 여겼던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 곁에 묻혔다.

 

언젠가 이한열이 남긴 글에는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는 구절이 있다.

 

그는 정말 그의 바람대로 최루탄 가스에 얼룩진 하늘을 날아올라 어려서부터 자란 광주 땅에 영면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 김정희(이한열기념사업회)


그렇게 광주로 날아간 이한열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가져온 6월항쟁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6월이면 연세대학교에서 추모제가 열립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의 걸개그림이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에 걸리고 각 캠퍼스의 단과대학에는 임시 분향소가 마련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힘껏 투쟁한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넋과 얼을 기리기 위한 이 행사엔 당시 옆을 지켰던 학우들과 민주화 운동가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매년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한열 열사 1주기 추도식의 모습.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 1주기 추도식의 모습.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 5주기 추모식에서 헌화하는 이한열의 부모님.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 9주기 추모식에서 헌화하는 배은심 여사.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 20주기 추모식에서 이한열의 그림을 보고 우는 배은심 여사.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한열 열사 27주기 추모식 장면. (출처 : 서울신문)
이한열 열사 33주기 추모비에 묵념하는 학생들. (출처 : 연세대학교 연세공감)

 

특별히 이번 33회 추모제에는 민갑룡 제21대 경찰청장이 직접 참여해 경찰 수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너무 늦었습니다. (저희도) 참회합니다.

 

- 민갑룡 제21대 경찰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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