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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ssay/(2) Document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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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에 뒤통수를 가격당한 이한열을 부축해 병원으로 옮기는 학생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6월 9일 오후 5시, 이한열은 신촌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전경의 직격 최루탄에 뒤통수를 가격당했습니다.

 

30분 뒤, 세브란스 응급실에 실려갈 때까지 의식이 있었던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진 이한열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집중치료를 받게 됩니다.

 

이한열의 상태에 대하여 기자회견하는 세브란스 병원 신정순 원장과 이한열의 주치의 정상섭.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월 5일, 0시 10분경 중환자실에 있던 이한열의 혈압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약 50분이 지난 새벽 1시부터는 심장정지(반사상태)에 빠졌습니다.

 

담당의는 혈압 상승제를 투입하고 심폐소생술로 응급처리를 했으나 2시 5분, 이한열은 끝내 사망하고 맙니다.

 

직접 사인은 심폐기능정지, 중간 선행사인은 폐렴, 최초의 선행사인은 뇌의 손상이며, 뇌 손상은 첫째 두개강 내출혈, 둘째 뇌좌상, 셋째 두개강 내 이물질 함유였습니다.

 

2시 20분, 이한열은 세브란스 지하통로를 통해 의과대학 본관 건물 지하의 영안실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6월 9일, 최루탄을 피격당하고 병실로 옮겨진 이한열의 모습. 중환자실로 이송된 뒤에는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 소식을 들은 경찰은 새벽 3시부터 사복 형사가 포함된 1개 중대 150명을 영안실 세브란스 정문과 주차장, 후문 등에 배치했습니다.

 

이후에는 30개 중대 4,500명의 전경을 연세대학교 정문부터 동문, 후문, 세브란스 출입구와 신촌 로터리까지 배치했습니다.

 

심지어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금화터널에이르는 500 미터의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불심검문까지 실시했습니다.

 

세브란스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학생들을 진압하는 경찰의 모습. 이한열 열사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을 끝까지 투쟁했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이한열 사망 3시간 뒤인 5시 26분, 세브란스 회의실에서 열린 <이한열 군 사건 대책회의>에서는 유가족들에게 사인을 설명하고 부검 절차, 장례 일정 등이 논의되었습니다.

 

회의는 6시 35분까지 이어졌는데 검찰이 계속 압박을 해서 회의를 더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한열 사망 3시간 뒤인 5시 26분, 세브란스 회의실에서 열린 <이한열 군 사건 대책회의>에서는 유가족들에게 사인을 설명하고 부검 절차, 장례 일정 등이 논의 되었습니다. 회의는 6시 35분까지 이어졌는데 검찰이 계속 압박을 해서 회의를 더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망 후 6시간이 지난 오전 8시 50분부터 11시까지 약 2시간 동안 세브란스 부검실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이정빈 교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의 집도로 부검이 실시되었습니다.

 

여기서 뇌간에 박힌 2~3mm 크기의 금속성 파편 2개를 찾아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옮겨져 분석이 진행되었습니다.

 

 

부검 및 분석 결과, 이물질과 암모니아시약(약청색 반응), 질산암모늄(백색 침전)등의 반응을 통해 뇌 속에 있던 2~3mm 크기의 파편은 최루탄 뇌관인 구리 물질의 파열체임이 증명 되었습니다.

 

따라서 검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부검과 분석 결과에 따라서 최루탄의 뇌관인 구리 성분 파편에 사망한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뇌속 이물질은 최루탄 파편|과학수사연 이군 사인 최종확인|「SY44』뇌관의 조각|학생장 예정바��

연세대생 이한열군 (20· 경영2) 은 경찰이 쏜 SY-44최루탄 뇌관파편을 머리에 맞아 숨진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검찰은 7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 실시한 이군뇌속 2개의 금속파편과 당일경��

news.joins.com

부검이 끝나고 유가족과 변호사, 학교 관계자들은 <이한열 열사 장례준비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유가족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영원한 연세인’으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 가족의 기본적 입장이다. 이에 근거하여 모든절차가 치러졌으면 한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및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단체들은 후원단체로 참여하기를 바란다.

 

2. 연세대학교에서는 시설과 편의를 제공해주었으면 한다.

 

3. 유택 마련은 연세인들과 많은 사람들에게그 정신을 기릴 수 있는 장소이기를, 가능하면 연세대학교 교정이었으면 좋겠다.

 

4. 추모비 건립에있어서는 총학생회의 명의와 후원단체로하는 게 좋겠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추모비는 빠른 시일 내에 연세대학교 안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5. 삼우제는 모든 국민들과 함께 치러지기를 원한다. 7월6일 오전 10시에 연세대학교 교목실장의 주도로 입관예배가 있으리라 본다.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 국민장>의 일정 및 운구행렬 경로가 담긴 문서. 7월 9일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입장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장례명칭 :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 국민장

 

주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참여 :민주 단체 및 후원 단체

 

장지 : 광주 망월동 묘역

 

날짜 : 7월 9일 오전 7시

 

1. 현 정세는 기만적 민주화 조치로 우리 국민은 우롱 당하고 있음.

 

2. 구체적으로고 이한열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6·10 이후 민주화 투쟁으로서 의미가 부여되어야한다. 고 이한열군 장례는 민주영령으로서 합법적, 국민적 차원의 장례식이 되어야 한다.

 

3. 7월 5일 새벽 3시부터 영안실 앞과 학교 안 그리고 학교, 병원 주위 및 신촌 로터리 일대에 2만 명의 정/사복 경찰을배치. 폭력적으로 학생, 친지들과 국민들을 분리시키고 대책회의를 통해 검찰 관계자 20명이 병원 측과 가족을 협박하였다.

이는 이한열 군 장례식을 어렵게 이끌어 신성한 장례를 침탈하려는 작태였고 군부독재의 기만성을 폭로한 것이다.

 

4. 이후의 고 이한열 열사의 추모기간을 설정하고, 범국민적차원에서 기만적 민주화 분쇄와 군부독재 타도 투쟁을 진행시킨다는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에서 찍힌 이한열의 모습. 사진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에 교련복을 입은 학생이 있고, 그 왼쪽에 있는 사람이 이한열이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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