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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ssay/(2) Document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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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한국을 방문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 네이선 벤이 공개한 컬러 사진

 

1987년 6월 9일 오후 2시, 경영학과 2학년이었던 이한열은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구출학우 환영 및 6·10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총궐기대회>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참가 직전에 이한열은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만화사랑> 동아리방에서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습니다.

 


"피로 얼룩진 땅. 차라리 내가 제물이 되어 최루탄 가스로 얼룩진 저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싶다."


 

오후 5시, 경찰과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이 서로 몸부림 치는 가운데 최루탄 한 발이 이한열을 향해 날아왔습니다.

 

여기서 이한열은 가장 앞에서 경찰을 막으며 학우들에게 도망갈 시간을 버는 사수대 역할로 행진 가장 앞렬에 있었습니다.

 

앞의 컬러사진에서 찾은 이한열 열사의 모습. 최루탄 피격 직전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평소와는 너무나 다르게 최루탄이 직선으로 날아왔습니다.

 

총기 구조상 안전의 이유로 총구가 30~45도 이상 올라갔을 때만 발사되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벽돌 크기의 500g짜fl 최루탄이 이한열의 뒤통수를 향해 그대로 날아왔습니다.

 

87년 당시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던 국산 최루탄 SY44의 겉모습과 뇌관 부위. (출처 : 조선일보)

 

김선동 최루탄, 85년 경찰이 구입한 1만발 중 1발

김선동 의원이 터뜨린 최루탄 파편(왼쪽 사진). 23일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공개했다.‘SY-4 4총류탄신관’이라고 새겨진 문구가 보인다. 오른쪽은 SY-44총류탄. [뉴시스]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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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찰이 진압에 사용했던 총은 미국 레밍턴 사(社)의 레밍턴 M870이었습니다. 이 산탄총은 1951년에 개발되어 현재도 미국, 한국, 독일, 영국 등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원래는 수렵이나 호신용으로 개발되었는데 점차 다용도로 쓰이며 해병대, 특수부대를 포함한 군과 경찰에게도 보급되었습니다.

 

해외에서 쓰이던 레밍턴 M870은 삼양화학을 통해 국내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양화학이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확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국내에서 같은 모델을 생산해 최루탄 발사기를 달아 보급했습니다.

 

레밍턴 M870에 결합되어 사용되었던 삼양화학의 SY44 최루탄. (출처 : 대한민국 경찰박물관)

 

레밍턴 M870에 결합되어 사용되었던 삼양화학의 SY44 최루탄. (출처 : 대한민국 경찰박물관)

 

레밍턴 M870에 결합되어 사용되었던 삼양화학의 SY44 최루탄. (출처 : 대한민국 경찰박물관)

 

이런 산탄총에서 발사된 최루탄은 상당히 위험했습니다.

 

최루가스도 고통스러웠지만 삼양화학에서 제작한 SY-44란 최루탄에 자체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루탄은 발사된 통 안에 있는 최루가스가 나오는 분말확산형 장비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에는 통이 터지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비살상용 진압무기라서 터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직 경찰들과 당시 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삼양화학이 제작한 최루탄은 재질의 결함으로 가스를 담고 있는 통이 터지면서 파편이 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날이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화약이 젖어 불발되는 일도 잦았습니다.

 

그래서 안전장치를 꼭 확인하고 사람을 피해 최대한 곡사로 사용하는 것을 권장했습니다.

 

그러나 이한열은 뒤통수에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산탄총 무장의 역사가 있었다-경찰의 SY-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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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진행된 조사에 따르면 경찰은 '효과적인 진압'을 위해서 임의로 안전장치를 해제해 발포했습니다.

 

레밍턴 M870이 국내에 들어와 최루탄 발사기로 만들어질 때 총을 30~45도 이상 들지 않으면 격발이 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는데 이를 불법으로 개조해 발사한 것입니다.

 

이처럼 경찰은 총을 가로로 눕혀서 쏘거나 이쑤시개와 같은 이물질을 넣어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등 진압 매뉴얼을 무시한 채 총기를 사용했습니다.

 

최루탄 직격발사 된다/“45도 발사”경찰 주장 뒤집어

◎숭실대생 실험공개철근을 끼워넣은 시위진압용 죽도와 쇠파이프가 든 경찰 진압봉에 이어 직격탄 발사가 가능토록 조작된 최루탄 발사기가 공개됐다.숭실대총학생회는 20일 오후 학생회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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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밍턴 M870과 같은 펌프액션 산탄총의 발사 원리. 총을 45도 이상 들지 않으면 안전장치가 작동해 총탄이 뒤로 밀리며 장전되지 않아 격발이 불가능하게 된다. 즉 '노리쇠 격발'을 막았다.(출처 : 핀터레스트)

현재 이런 최루탄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찰은 1998년 이후부터 최루탄을 금지했고 지금은 고추에서 추출한 캡사이신 성분이 들어간 분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017년 전국 경찰서에서 보유하고 있는 최루탄을 조사해 전량 폐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연합뉴스의 관련 기사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19년전 국내사용 전면 중단된 최루탄의 기억…지금은 | 연합뉴스

19년전 국내사용 전면 중단된 최루탄의 기억…지금은, 김선호기자, 사회뉴스 (송고시간 2017-06-10 06:35)

www.yna.co.kr

오후 5시 정각, 이한열은 교문에서 약 50cm ~1m 떨어진 지점에서 이렇게 불법으로 개조된 총기에 의해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았습니다.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은 머리와 코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이 모습을 도서관학과(현재의 문헌정보학과)2학년 이종창이 보고 부축해 학교 안으로 피신시켰고 다른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세브란스 응급실로 이송되었습니다.

 

이종창은 당시를 회고하며 그때까지 이한열이 누군지 몰랐다고 증언했습니다.

 

 

 

좌측은 컬러로 복원된 현장의 모습. 우측이 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부축하는 이종창의 모습이다. 교과서나 대중 강연에서 이한열과 6.10항쟁를 다룰 때마다 항상 인용되는 사진이 바로 이 사진이다. 이 사진은 당시 취재를 나왔던 로이터 통신의 정태원 기자가 촬영하였다. (출처 : KBS)

 

비록 이한열은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았지만 아직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종창과 주변 학우들이 부축하자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물었으며 30분 뒤인 오후 5시 30분, 세브란스 응급실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을 업고 가는 학우들에게 "쉬었다 가자"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브란스 도착 이후 호흡장애와 사지마비, 경련이 일어났고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져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끝으로 완전히 의식을 잃었습니다.

 

이에 연세대학교는 내과, 외과, 신경외과 등 전문의 12명을 모아 종합 의료진을 구성했고, 학생들은 같은 해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숨기려고 몰래 화장해 유가족에게 뼛가루만 주었던 경찰의 만행이 다시 일어날 것을 우려해 수십명 씩 조를 짜서 병실을 지켰습니다.

 

이한열이 입원한 세브란스 현관에 붙은 대자보와 경비조를 짜서 이한열을 지키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 대자보에서 슬픔과 분노가 느껴진다. (출처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피격 다음날인 6월 10일, 국내 언론과 외신(AP통신과 로이터 통신)을 통해 보도된 이한열이 피를 흘리며 부축받는 사진을 본 국민들은 매우 분노했습니다.

 

이미 1월에 서울대생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었는데 겨우 5개월 만에 다시 대학생이 경찰에 의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규탄대회와 집회가 열렸습니다.

 

평소에 학생운동이나 집회를 부정적으로 보았던 일반 학생들과 시민들조차 관련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이한열 열사의 회복을 기원하는 학생들. 무릎을 꿇고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출처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이때부터 전국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지역, 성별, 나이, 취미, 가치관은 달랐지만 마음만은 같았습니다.

 

연세대학교와 서강대, 고려대 교수들은 성금을 모아 이한열 부모님에게 전달했고 세브란스 병원의 식당 아주머니들은 경비를 서는 학생들에게 밥을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간호대 학생들은 집회가 있는 날마다 구급함을 가져와 다친 학생들을 보살폈으며 휴학생과 축구부, 아이스하키부의 학생들도 병실 경비에 나섰습니다.

 

간호대 학생들은 집회가 있는 날마다 구급함을 가져와 다친 학생들을 보살폈으며 휴학생과 축구부, 아이스하키부의 학생들도 병실 경비에 나섰습니다.

특히 100kg가 넘었던 체육교육학과 백성기는 경찰로부터 직접 이한열의 부모님을 경호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한열의 피격은 모두에게 큰 슬픔이었고 국민적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이한열은 약 27일이 지난 87년 7월 5일, 새벽 2시 5분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가택연금이 끝난 6월 30일에 병문안을 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출처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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