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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ssay/(2) Document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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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오후 2시, 연세대학교에서 <구출학우 환영 및 6·10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총궐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지금도 매년 아카라카와 연고전 합동응원제가 열리는 노천극장과 중앙도서관 앞 백양로에 모인 약 1~2천 명의 학생들은 외쳤습니다.

 

연세대학교 노천극장

교육 · 신촌동

www.google.com


호헌철폐(護憲撤廢!)!

 

독재타도(獨裁打倒)!

 

민주쟁취(民主爭取!)


 

그리고 오후 5시에 거리 행진을 위해 정문 밖으로 나가는 도중 경찰과 부딪히게 됩니다.

 

당시 경찰은 집회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의 주요 도심과 대학가에 경찰을 배치했는데 마찬가지로 연세대학교 정문에도 수많은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학생들에게 경고도 없이 마구잡이로 최루탄(SY-44)을 쏘았습니다.

 

경찰은 연간 약 200만 발 이상의 최루탄을 시민들에게 발포했는데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최루탄을 제작해 납품하던 삼양화학 회장 한영자의 소득세가 87년 당시 전국 1위였습니다.

 

 

최루탄 기업의 진화···임대업까지 손뻗은 ‘삼양화학그룹’ - 시사저널e - 온라인 저널리즘의 �

독점적 최루탄 생산으로 군사정권 시절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삼양화학그룹이 변화하고 있다. 군수물품을 주로 취급했던 과거에서 탈피해 각종 화학 원료사업으로 성장한데 이어, 부동산사업��

www.sisajournal-e.com

이런 무차별적인 진압에 학생들은 서로 몸을 붙잡고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당시 86학번이었던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한열은 행진 제일 앞에서 경찰을 막으며 다른 학생들의 후퇴할 시간을 버는 사수대(전조대, 전투대, 전위대와 함께 비슷한 말)였습니다.

 

출처 : 이한열기념사업회

지금은 열사로 불리고 있는 이한열은 문학과 만화, 음악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만화사랑>이라는 동아리와 전문 경영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경영학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학생이었고 미팅에 나가면 부끄러워 말을 감췄던 21살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한열이는 온순하고 여리고 착한 친구였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도 공부에 소홀하지 않았고, 장남인 자신에게 기대를 많이 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한열이는 결코 투사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한열이가 살아 있다면 지금 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 함께 활동했던 동아리 선후배와 같은 학과 동기들이 증언 기록에서 발췌


 

 

오죽하면 처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갈 때 입에서 술냄새가 날까 봐 은단껌을 사서 씹었던 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선배들이 권하는 술잔을 호기심에서 마셔본 일 등. 난생 처음 마셔보았는데 의외로 나는 술이 강했다. 선의의 탈선을 주장하는 선배 형님들. 나도 그 속에서 3박 4일동안 멋지게 놀았다.


 

방학 때는 밀린 공부도 하고 시내에서 영화도 보며 친구들과 팝송을 듣고 장난치기를 좋아했던 이한열은 학교에서 열린 <광주시민 학살 전시회>의 전시회와 비디오를 보고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무풍지대에서 스스로 망각한 채 살아온 지난날이 부끄럽다. 하여 오늘은 다시 살아나는 날. ‘내’가 ‘우리’가 되는 날이어야 한다.


 

어떤 증언에서는 자신의 이름에 있는 열(烈)이 ‘매울 열’이라며 최루탄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도 했다고 합니다.

 

학생열사 – 유가협

6월 민주를 향한 젊은이의 외침이 하늘을 가르고, 땅을 흔들던 날 그 외침은 우리의 가슴을 열고 독재의 머리를 겨냥했습니다. 펑! 날아온 직격 최루탄의 폭발소리는 젊은이의 뼈를 바수고 혈관�

ugh.kr

또 다른 기록에서는 4.19 혁명의 시발점인 김주열 열사와 자신의 이름 끝 글자가 같다며 자주 비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 국가법령정보센터, <헌법 제10호>, 1987.10.29 전부 개정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득표율이 100%였던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3.15 의거에 참여한 뒤 행방불명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1일, 마산의 한 바다에서 신원불명의 시체 한 구가 발견됩니다. 신원을 조회한 결과 3월 15일에 실종된 김주열 군이었습니다.

 

조사해보니 3.15 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의 최루탄에 눈이 관통되어 사망했고 시신이 바다에 버려진 것이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뉴스

당시 경찰은 "소요사태를 일으킨 폭동에 대한 정당한 진압"이었다고 말했으며 사체 유기와 사건 은폐 의혹에 대해서는 침묵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분노해 다시 거리로 나왔고 헌법 전문에 있는 4.19 혁명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한열 열사도 김주열 열사와 같이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주열 열사 시신, 돌멩이 매달아 바다에 버렸다"

-이승만 정부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항거 -1960년 3월 15일 사망, 시신에 돌멩이 매달아 바다에 버려져 -1960년 4월 11일 시신발견…전국적인 저항, 4.19 혁명으로 -'은행 사장 되고 싶다'메모…명문 마

www.nocutnews.co.kr

 

오픈아카이브

김주열을 아시나요? - 4.19 혁명

archives.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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