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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ssay/(2) Document

<콘크리트 유토피아 : 아파트 안과 밖의 사람들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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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넷플릭스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는데 정말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재밌었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현실적인 플룻과 사회 비판· 풍자, 기독교 모티프를 모두 가지고 있어서 엄청 몰입해서 봤다. 특히 아파트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속성을 인간의 적나라한 생존 본능과 결합시켰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웠다.

 

특히 아파트가 가진 물리적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연대와 배제의 논리가 인상 깊었다. 아파트 안과 밖은 삶과 죽음을 물리적으로 나누는 공간적 기준이 된다.

 

아파트 안은 최소한의 음식과 안전이 보장되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유토피아로 그려지며 밖은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는 죽음과 공포의 영역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유토피아 안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가치와 상식이 붕괴된 상황에서 그나마 끼니를 때우고 벽과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자며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맘껏 씻고 먹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두가 음식을 나눠 먹으며 파티도 열고 노래방 기계로 노래도 부르는 사치와 향락을 즐길 수 있으므로 겉모습은 꼬질꼬질하되 내면은 누구보다 가장 인간다운 존재들인 것이다.

 

이런 유토피아에 사는 내부인들과 다르게 외부인들은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삶을 이어 나간다. 일부는 아파트의 복도와 계단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버티다가 쫓겨났기에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악착같이 살아간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유토피아를 잠깐 맛보았다가 쫓겨난 이들은 다시 유토피아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토피아를 향한 복귀가 아닌 유토피아의 파괴를 원한다.

 

유토피아라는 보장된 공간에 들어가 선택받은 자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거부한 유토피아 자체를 파괴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극 중에서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인육을 먹는 집단"으로 매도한다.

 

축출의 경험은 상당히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워서 가치의 전도를 일으킨다는 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복음서를 예로 들어보자. 요한복음을 저술했다고 알려진 요한 공동체는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당시 사회 기득권이었던 유대 공동체로부터 축출당하며 갖은 모욕과 핍박을 받았다.

 

회당과 마을에서 쫓겨나 자신들만의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어야 했던 요한 공동체는 유대 공동체로의 복귀나 복권을 꿈꾸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유대 공동체의 회당과 율법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다며 가치의 전도, 곧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시했다.

 

이처럼 쫓겨난 이들에게 매도당하기 시작한 유토피아는 점차 빛을 잃어가서 궁극에는 우렁찼던 "으랏차차 황궁! 으랏차차 황궁! 가자 화이팅!" 구호마저 사그라지게 만든다.

 

영화 후반부에 아파트를 습격하여 사람들을 공격하고 물건을 약탈하지만 어디까지나 아파트는 식량과 유용한 물건이 많은 탐스러운 곳간일 뿐 더 이상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아파트의 식량이 떨어져 급조한 수색대를 밖으로 내보낸 순간부터 안과 밖의 유토피아는 이윽고 역전된다. 것이다. 처음에는 문명의 온기가 남아있던 아파트가 유토피아처럼 보였겠지만 폐쇄된 집단이 늘 그러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트 안은 더욱 빨리 부패하고 몰락하게 된다.

 

사실 안과 밖은 역전될 수밖에 없다. 안의 사람들에게는 유토피아가 아파트라는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밖의 사람들에게는 아파트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유토피아다.

 

당장 물리적으로 외부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겠지만 아파트라는 공간은 고정되어 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먼 곳까지 나가서 식량과 보급품을 조달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안이 훨씬 더 불리한 구조다.

 

영화 중반부를 넘자 어떤 아파트 주민이 이렇게 말한다. "아파트 주변의 시체가 사라지는 이유는 바퀴벌레들(아파트 밖의 사람들)이 시체를 가져가서 먹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가치의 전도, 바로 유토피아에서 쫓겨난 이들이 했던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유토피아가 안에서 밖으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짚어주는 장면이다.

 

또 영화 초반부에 황궁 아파트보다 비쌌던 프리미엄 단지 '드림 팰리스' 입주민들이 대지진 이후 황궁 아파트 비상계단과 복도에서 지내는 장면이 있다. 이때 황궁 아파트 입주민들은 "평소에 드림 팰리스 근처에도 못 오게 했었다"고 말하는데 입장 바꿔 생각해보면 묘하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아주 재밌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황궁으로부터 쫓겨난 밖의 사람들은 선한 피해자일까? 사실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아파트 밖으로 쫓겨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신들보다 약한 대상을 찾아서 빼앗고 죽이며 삶을 살아가고 있어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안에서는 누구도 선하지 않다. 반대로 누구도 악하지 않다.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만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아파트라는 물리적 공간을 경계로 안과 밖의 대립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연대와 배제는 한국 사회를 축약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평균, 정상,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아래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차별의 논리부터 안에서의 연대, 밖에서의 연대는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이념과 사상이 부딪히며 양극화로 갈라진 한국 사회를 떠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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