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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 멋대로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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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이후 언론은 이 작품이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된 시저(주인공으로 비추어지는 유인원의 리더. 전작 정주행 권장.)"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는 거북한 느낌이 담겨있다.

이 시리즈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인간과 다른 종이 공존과 상생을 이룰 수 있을까?"와 "만약, 그 가능성이 일어난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단순한 물음이다.

먼저,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익숙한 2001년도 헐리우드판과는 다른 계보를 가지고 있다. 60-70년대 원작을 기초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나름 SF와 판타지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인류와 다른 종의 만남, 교류와 갈등이라는 소재는 비단 한 시리즈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인간은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작품 속에서의 인간은 불안해하고 그 대상을 파헤치고 끝내 정복하려는 본능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인 '상생과 공존'이 가능할까? 최근, 환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흔히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하고 또 그런 것이 유행처럼 번져 갔다.

우리가 이루는 작은 소비에서조차 이런 풍조가 담겨 공정무역 마크가 붙어있는 것이 진보적이고 지식인같아 보이는 열풍이 일어 났다.

학계에서는 더 이상의 수직적인 자연구조를 외치지 않는다. 수평적인 자연구조를 가장 완성적이고 이상적인 구조로 여기기 때문이다. 각 선진국은 매년 수 억원의 자본을 아마존에 투입시켜 아직 등록되지 않은 종을 탐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무작정 벌목이 아닌 선택 벌목, 재활용품 사용 권장, 가스 오염 제한, 순차적 채식주의 등 우리는 에코 강박증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환경과 자연에 집착하며 지내고 있다. 마치 이런 풍조에 합류하지 않으면 개발도상국으로 여겨지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소비가 과연 상생과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자연에게 끼치는 피해를 줄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이런 행동들은 궁극적으로 함께 지내는 삶을 이룰 수 있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 자연을 지키면 좋지. 이런 노력들을 지켜서 잘 가꾸고 미래의 인류에게 물려주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 역시 자연의 입장보다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생존 방법
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세기까지 기독교에서는 소위 '청지기론'을 펼치며 '신이 주신 자연을 인간이 선하게 가꾸고 다스린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이런 시도는 나름 자연에 대한 또 다른 환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정작 각 교회에서 매주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폐품과 소모품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생태신학'이라는 또 하나의 반동이 태동하며 그 여파를 수습하고 새로운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이런 시도들이 모두 자연의 입장이 아닌 생태계의 갑인 인류의 입장에서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TED에서 주목을 끌었던 '까마귀 자판기'가 이 부분에 대한 적절한 예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환경오염과 쓰레기 배출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까마귀를 교육시킨다는 내용이다.

까마귀가 쓰레기나 특정 수집품(알류미늄, 고철 등.)을 자판기에 넣으면 견과류와 같은 먹잇감이 나온다는 원리다. 나는 이 획기적인 제안이 또 다른 자연 파괴와 질서 혼돈을 유발한다고 생각한다.

인류가 저지른 자연 손상을, 다시 자연으로 회복시킨다는 주객이 전도된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류가 환경과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직접 나서서 활동하는 것이 더욱 그럴 듯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처럼 사실상 현존하는 자연과 생태계 담론이나 실천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자연의 희생을 강요하는 매우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다. 마치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평화'를 요구하며 물리적인 힘으로 짓누르는 것처럼.

이런 흐름 속에서 '혹성탈출'은 그 잘못된 균형을 철저히 부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류와 유전자적 흐름을 같이 하고 있는 유인원의 모습에서 그 대안을 찾으려는 제작 의도는 우리의 잘못된 모습을 그대로 투사시키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난 작품의 흐름을 그대로 가져온 이번 작품은 과학적인 연구 활동으로 치매나 불치병을 극복하기위해 유인원을 실험했는데, 그 과정에서 만든 실험약품이 실수로 유출되어 인류의 절반 정도가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에 살아남은 인간들(선천적인 면역체를 타고 난.)은 생존을 위해 유인원과 불가피한 갈등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유인원을 등장시킨 것일까?

유인원은 진화론의 등장 이후, 인간과 가장 유사한 종으로 대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가장 유사한 이 자연적인 종이 인간과는 어떤 다른 모습을 보이고,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작품 속에서 유인원은 인간처럼 행동하고 말을 하며 심지어 인간의 무기를 다루며 강력하게 대응한다. 물론, 어떤 인간들은 이들의 피해자이며 자연의 일부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인간다움을 강요하거나 교육한 적도 없는데도 인간처럼 행동하며 대응하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왠지 모를 무서움과 슬픔을 느낀다. 어쩌면 인류는 자연에게 '인간다움'을 강제로 주입시키며 지낸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연과 생태계, 그 일부인 동물을 보면 습관적으로 사람답고 인간같은 부분을 찾는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는 자부심과 자만함을 가지고 그들에게 감정과 사고가 있는지 면밀히 살핀다.

어린 동물에게 모성애를 느끼고, 그들을 가정에서 품기 위해 강제로 가족과 떨어뜨리고 비행기 화물칸으로 운반한다. 그리고 각종 행동실험을 마치고 끝내 해부해 박물관에 전시한다. 이것이 인류가 자연을 대하는 방법다. 자르고, 분해하고 전시하는 것.

강제로 표본이 된 자연의 일부는 인류로 하여금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인류는 또 그런 행동을 통해 안정을 취한다. "아, 아직 우리가 자연에서 최고구나! 앞으로 100년은 살 수 있겠어!"

자연을 그대로 보지 않고, 인간다움을 멋대로 투약하는 행동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인류는 또 다시 자만으로 몰락하고 말 것 같은 불안감은 단지 신호가 아니라 현실이다.

유인원이 인간처럼 집을 짓고, 가족을 구성하며 지내고 인간처럼 다투고 강간하고 살육한다는 것을 밝혀낸 '제인 구달'은 자신의 저서인 '희망의 이유'에서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단순히 자연의 메커니즘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평생 유인원(특히, 침팬지.)를 연구하며 그녀는 그들도 인간처럼 사회나 공동체가 있고 살육과 식인(동료의 시체를 훼손하고 먹는 행위.)를 벌인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 행동들이 자연의 기계적이고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고유의 영혼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즉,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여겨진 감정과 사랑, 생각과 사고 등은 사실 자연 전체가 품고 있는 고유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지난 수 천년동안 종교, 특히 기독교는 동물이나 식물은 영혼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학적인(그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유명하다.) 사고와 동물학적인 관점을 더해 자연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고, 거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다움을 가진 것에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만드는 제인 구달의 연구결과는 아직도 회자되며 인간이 자연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철저하게 부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혹성탈출은 인간이 생각했던 자연에 의해서 진정 인간다워지는 모습을 그려낸 처절한 투쟁이 담긴 역사 기록물이다.

종의 진화를 무기로 내세웠던 우리는 이제 새로운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곧 자연에 의해 멸종될 위기에 놓여있다. 총과 칼을 들고 상대적으로 약한 종을 지배하며 지낼 것인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그 뿌리를 뻗을 것인가는 인류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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