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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nusual type/(2) Etc

영화 '명량'을 멋대로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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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도 제대로 뿌리지 못했던 시덥잖은 올 여름 대신 낯익은 장수가 기염을 토했다. 이순신, 이웃사촌보다 친근한 이름이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1,6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이순신과 함께 구선을 타고 왜군을 무찔렀다. 판옥선이 불을 뿜을 때마다 관객들의 팝콘과 콜라는 금세 동이 났다.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애국심과 호국에 대한 관심은 모두의 공감을 사기 충분했다.

언론은 호기좋게 순항 중인 명량을 향해 극찬을 아끼지 않음과 동시에 민족주의 작품 혹은 애국주의적인 자긍심을 갖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날카로운 평을 내렸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이순신이 주는 묘한 느낌과 함께 전체주의적으로 휩쓸리지 않겠다며 관람 반대 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벌레와 선비는 명량을 앞다투어 다루며 평생 보기 힘든 화합을 이뤘다.

사실 1,600만이라는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순신이라는 친근한 장수의 영향이나 동시에 개봉한 다른 작품들이 부실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실과 결과에 기초해 꾸몄기 때문에 스포나 부정적인 입소문에 덜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앞서 개봉했던 '경주'와 같은 작품처럼 동양인의 시선이 담긴 동양적인 영화였기 때문에 오히려 반감이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다.

즉, 서양이 보는 동양에 대한 폐혜를 찾아보기 힘들었다.(어쩌면 이것도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겠지만.)

또한 역사 영화는 교훈을 담아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보통 역사를 지겹다고 여기는 건 그런 일련의 사건들에서 억지로 교훈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흔히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거나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알고 있으면 일어날 일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그런 시도는 역사를 도구나 어떤 이득을 취하려는 노력으로만 국한시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탈무드가 아니다. 하물며 처세술을 자세하게 알려주는 지침서나 자기 계발서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명량은 억지스러운 의미를 유도하기보다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색다른 접근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명량은 그간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편견을 벗겨내는데 힘썼다. 작품 중 이순신은 용맹스럽고 참된 장수, 호국에 전부를 쏟은 충무공 정도로 알려진 기존의 인식과는 다른 느낌이 든다.

특히, '칼의 노래'를 접한 사람이라면 어딘가 비슷한 점을 느낄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명량에서도 빈번히 보이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인 면모다.

군율에 엄한 상관,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 나라를 걱정하는 무관,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위기를 그대로 받아드리며 고뇌하는 지도자의 모습까지.

이순신은 최민식이라는 배우에게 덧입혀져 성인에서 인간으로 비추어졌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거라."

말하기를 더디하고 들으며 생각을 되묻는 그의 모습은 현대사회의 부모와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인다.

그렇다면 명량은 역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라고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이 작품은 '종교 영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의병의 모습이 다른 역사 영화와는 다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종교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두 가지 역할로 나뉘는데 현세와 내세의 연결하는 접점으로서의 역할과 구호, 구제 등 삶과 삶을 이어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 두 가지 구분은 종교의 평시와 전시의 역할로도 나뉠 수 있다.

즉, 일반적인 상황에서 종교는 현세와 내세를 이어주고 특수한 상황에서는 도움을 주고 보살피는 일을 한다. 특별히 명량의 배경인 시절의 종교, 다시 말해서 불교(민간신앙 포함.)는 그런 역할을 감당하는 부분이었다.

불교는 현세를 떠나고, 사념을 버림과 동시에 윤회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완전히 연을 끊지 않은 상태에서 생과 사를 이어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당시 의병으로 참가한 승려들은 비주류로 인정받았다.

현세에 대한 집착과 관심이 많고, 살육을 자처한다는 입장에서 그들은 파계승으로 여겨졌다. 극악무도한 승려로 낙인찍혀 파면을 당하기 일쑤였다. 대부분은 팔만대장경이나 염불을 외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낫과 호미, 죽창을 들고 국토를 오고 가며 호국에 힘썼다. 스스로 피를 뒤집어 쓰고 불경 대신 곡소리를 들어가며 살아갔다. 다음 생에 대한 염려나 걱정보다 당장 빼앗길 위기에 처한 현세가 더욱 중요했다.

전란으로 시달이는 민초, 고통받는 민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속세와 떨어진 사찰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다.

명량에서는 유독 의병의 모습이 자주 스크린에 나타난다. 위기의 상황에서 염불을 외우거나 침묵으로 묵묵히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관객에게 묘한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요즘 종교랑은 많이 다른데?" 지금도 여전히 구국, 호국 을 위해 힘쓰는 종교단체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순수한 의도라기보다는 특정 교리나 제의,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는게 사실이다.(친일, 반공 이데올로기 집합소.)

개인적으로 종교는 구제와 적선, 삶에 대한 성찰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요구와 부름에 응답하는 것도 한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의병은 종교인의 과한 행동이나 참여가 아닌 당연한 일이다. 파면 당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다.

명량에서 나타나는 의병은 이 정신을 강하게 나타낸다. 대립과 갈등 사이에서 먼저 목소리를 내며 경전과 교리를 들이밀며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종교는 답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 차선책이다. "너 이렇게 하면 지옥간다."는 종교적 독선이 담긴 폭력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렇게 해보는건 어떨까?"라는 말이 종교가 해야할 유일한 대답이다.

또한, 원균의 고집으로 육군에 편입될 위기에 놓였을 때 의병들은 함께 해군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판옥선에 함께 승선한다. 눈 여겨 볼점은 염불을 위하기 위해 탑승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의병은 종교인이라는 직함과 위치를 버리고 승선한 모든 사람과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특혜나 편의를 구하지 않는다. 대접 받기보다 대접하기를 자청한다.

왜군이 갑판에 올라오면 힘껏 싸운다. 판옥선이 물살에 밀릴 때, 염불을 멈추고 노를 젓는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 눈을 감고 신의 자비와 사랑을 구한다. 모든 위치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의병이야말로, 오늘날 종교인이 지닐 태도 아닐까.

요즘 종교는 사회의 요구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답한다고 보기 힘든 일을 많이 자행하고 있다. 각종 비리에 연루되고 실형 선고 받기 일수다.

성직자들은 도덕적 결함이 너무도 많다. 교단과 교파는 종교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교세 확장, 교력만을 위해 무리한 확장과 활동을 벌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신학교와 신학생은 주입식으로 신학을 배우고, 학점 이수와 졸업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 학교, 집, 종교시설만을 오가며 문화와 사회에 관심을 끈다.

앞으로 그들이 품어야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 그곳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는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종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요구한다.

사회가 종교의 한 부분을 지적하면 피해자마냥 울며 불며 종교적 탄압이라며 교인들을 이끌고 도로를 점거한다. 그리곤 강남, 신도시에 사찰과 교회, 성당을 짓고 외제차를 타며 평화로운 일상을 즐긴다.

문화를 즐긴다는 이유로 문화를 향유한다. 교지에는 헌금 액수와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이 세세하게 기록된다. 헌금을 적게 내면 따로 불러 쓴소리를 한다.

기업의 구조적인 면을 모두 가져왔는데, 기업의 업무 구조와 사원 관리를 요구하면 "신의 일인데, 이런 것도 못해줘?"라며 휴일에도 일을 강요한다. 아이들에게 "넌 신의 자녀야."라고 이해되지 않는 교리를 강제로 외우게 한다.

농촌 문제, 지역 문제, 수도권 과밀 문제, 노동, 정치, 사회와 경제는 번잡한 속세의 일로 여긴다. 그러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가미하며 교인들의 돈을 뺏는다. "힘들지만 참고 힘내서 좋은 곳에 갑시다."라는 가증스러운 말로 모두를 힘들게 한다.

의병의 모습이 사라진 종교에게 미래는 있을까. 판옥선이 바다를 넘실거리며 왜군을 충파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팔만대장경이나 구국 기도가 소용 없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 일어나는 소음을 속세로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명량에서 이순신은 작은 소리를 경하게 여기지 않았고, 모든 일에 크고 작음보다 모두 수고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를 젓는 농민을 천하게 여기지 않았다.

곁에 있는 이들을 속세라고 여기는 종교의 역할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지 쌀과 고기를 건네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처한 문제와 위치를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서로 나누는 게 종교의 진정한 역할이자 할 일이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12척으로 수백 척을 막은 명량에서의 일처럼 그 뜻이 모두의 마음에 와 닿는 일이 생길거라 믿는다. 이순신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충파하고 있다. "저 많은 원한을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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