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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nusual type/(2) Etc

영화 '마미(Mommy)' 멋대로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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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영화 'Mommy'의 포스터.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영화 'Mommy' 멋대로 파헤치기. 

* 최대한 스포를 배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의도치않게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 사실 이 작품 자체가 워낙 큰 틀에서 읽어지고 스포를 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개방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크게 지장은 없다.


 우리는 프로메테우스의 공헌을 시작으로 셰익스피어와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두 가지 모습을 배웠다. ‘자연선택’에 따라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여 종의 계보를 이어가는 어머니와 그 헌신적인 역할에 대한 찬사 받는 어머니로 나누어져 왔다.


 전자는 숨겨진 배란으로 수컷에게 끊임없이 친자확인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했던 전략적인 생물학적 어머니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반면, 헌신적인 어머니는 그 역할에 대한 문학적인 접근이나 인간적인 부분을 부각시킨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이와 같은 어머니에 대한 두 가지 접근을 더욱 강화시켰다. 다양한 매체는 앞다투어 연로한 어머니의 모습을 대중에게 비추었다. 기업은 평생을 헌신한 어머니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들이 제공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그런 상황 속에 놓여 담배를 펴고 술을 한 잔 마실 때 혹은 어머니의 생일쯤에 셰익스피어의 말을 곱씹으며 간편한 감상에 젖는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해. 난 절대 저렇게 하지 못 할 거야.”


 하지만 말끔하고 정확하게 나누어진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 다시 말해 공급자와 수급자에 대한 분명한 구분이 어머니‘들’에게 얼마나 긍정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이젠 어머니가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 지내세요.”라는 말은 위로가 아닌 공급자의 지위를 박탈하는 ‘을’의 역습이며 관계의 단절은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물론, 최근까지 이어진 어머니에 대한 역할을 본다면 그런 시도 자체에 의미가 있겠지만.)


개인의 역할과 타인의 역할을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구분 짓는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지금, 영화 ‘Mommy’는 그 앞에 부자연스럽게 나타났다.




 2015년, 가상의 캐나다가 배경인 이 작품은 A.D.H.D 증후군과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아들 ‘스티브’를 키우는 어머니 ‘디안’의 삶과 주변의 관계를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디안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비가 부정적인 결과를 암시하게 만드는 장치라면, 이 사고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고 현장 가운데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아들이 격리된 보호시설에서 온 전화였다.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며, 스티브를 강제로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디안도 마음 편히 아들을 돌볼 상황은 아니었다. 아들이 벌인 일들을 수습하느라 시간과 돈을 대부분 탕진했고, 간간히 들어오는 일로 세금과 냉장고를 채우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디안은 어머니로써 아들을 품는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과 관계에 대한 일들을 그린 영화 ‘Mommy’에서 감독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려고 노력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프랑스 영화가 관객이자 당사자인 ‘우리’에게 던진 물음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확하다. 나는 그 물음을 ‘우리는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역할은 수많은 세대를 거쳐 왔다. 종을 이어가는 숭고한 어머니와 그 역할을 묵묵히 이행하는 위대한 어머니! 고대에서는 생존을 위해, 현대에서는 경쟁력을 위해 그 역할을 당연하게 부추기고 있는 것이 오늘이다. 


 그런 부분에서 어머니는 고대와 현대에서 큰 차이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 인권의 신장, 양육과 출산지원 확대는 여성사에서 큰 전환점이지만, 오직 눈에 보이는 차이는 수명의 연장으로 생긴 폐경이라는 자연의 문턱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역할의 공통점은 모두 생물학적 여성만을 어머니로 바라보고 있다는 부분이다. 물론, 남성은 자연적으로 잉태와 출산을 수행할 수 없다. 의학의 발달로 충분히 통제된 상황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서는 가능하겠지만.(아놀드 슈왈제너거가 주연으로 나와 남성의 임신과 출산을 보여주었던 94년도의 영화 ‘쥬니어’처럼.)

 

 지금까지 우리는 어머니를 ‘자녀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는 건강하고 헌신적인 여성’으로 국한시켰다. 그렇지 못한 여성에겐 어머니라는 이름을 빼앗고 책임감 없다는 비난과 함께 모진 언행을 일삼았다.




 그 가운데 ‘Mommy’는 모두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역설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만약 우리의 기준으로 어머니인 ’디안’을 본다면,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이는 아들을 보살피기엔 너무나 부족한 어머니라고 혀를 찰 것이다.


 습관처럼 담배를 펴고, 세탁기 앞에서 태연하게 보드카를 따라 마시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정신질환을 겪은 아들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양육환경 또한 좋다고 보기 힘들다. 그들이 살아가는 곳은 주변엔 소통하는 이웃이 없고, 적막이 흐르는 한적한 동네다. 그저 그런 사람들이 모여 그저 그렇게 삶을 연명하는 현실과 크게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관객은 그 공간적 배경에 대해 친숙함을 느낀다.


 통제할 수 없는 아들을 통제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아세우는 어머니, 마땅히 사회적 책임과 공공질서의 차원에서 공권력, 조금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복지’의 개입이 필요한 모습이다. 


 복지의 절실함 속에 안식년을 맞은 교사 ‘카일라’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녀 또한 말을 더듬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 만약 옆집에 이런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다면 우리는 ‘총체적 난국’이란 말을 하지 않을까.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황 속에 이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말을 더듬고, 화를 참을 수 없고, 삶에 찌든 세 사람이 모여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기 시작한다. 지나친 차분함으로 따라온 말더듬이에게 화를 내게 만든다. 화를 참을 수 없는 아들 스티브에겐 차분함을 가르친다. 


 삶에 찌든 어머니 디안에겐 청소를 하고 접시를 닦으며 함께 짐을 짊어주려고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각자의 위치에서 ‘어머니’ 역할을 맡기 시작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부족한 세 사람(디안, 그의 아들 스티브 그리고 말을 더듬는 카일라.)은 그동안 누군가의 눈치와 편견에 갇혀 지냈다. 모자란 어머니, 쓸모없는 아들, 부족한 교사는 성공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그들은 완벽하고 자유롭다.


 감독은 관객이 이에 더 몰입 할 수 있도록 상영 비율로 굉장한 기교를 부렸다. 영화 시작부터 화면의 비율 굉장히 가파르고 협소하다. 대형 스크린과 고화질에 익숙한 우리에겐 불편하고 어색한 비율이다. 


 그런데 감독은 타인이 그들을 바라보는 장면에 대해서는 좁고 가파름을,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은 거대하고 광활한 비율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의 시선과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일치시킨다. 또한 관객을 인식하고 있는 듯 한 구도와 등장인물들의 시선처리는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결국, 영화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회적 연결을 형성한다. 그 연결의 시작은 서로를 그대로 바라보고, 눈치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워지는 연습으로부터 이루어진다.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을 조절할 수 없는 아들로부터 디안과 카일라는 무엇에도 얽메이지 않는 스스로, 즉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나’를 찾게 된다. 어머니, 교사와 같은 어떤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그대로의 나. 


 어머니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자신의 영역에 있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가차 없이 몸을 던진다. 실수와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누군가의 연약함을 들추어내기보다는, 침묵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느리다고, 남들에 비해 부족하다고 질책하지 않는다. 그 절정은 세 사람이 첫 만남을 가지고 모두 모여 조촐한 파티를 즐기는 장면에서 부각되어 나타난다. 


 아들 스티브는 삶에서 부단히 몸부림치는 어머니에게 매번 실망을 안겨준다. 이에 “언젠가는 엄마도 날 사랑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난 늘 엄마를 위해 살게.”라는 자기 고백을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시간이 흐를수록 난 널 더 사랑할거야. 반대로 넌 날 덜 사랑하게 되겠지.”이라는 말로 대답한다.


 엔딩 크레디트(편의상 크레딧.)에서 나오는 ‘Born to Die’(Lana Del Rey, 2012.)라는 제목의 배경음악처럼 어머니는 죽기 위해 태어난 이중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잉태와 양육, 죽음이라는 일련의 과정에 있는 어머니.


 그동안 우리는 잉태와 양육이라는 좁은 관점으로만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도로써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어머니의 역할, 그리고 서로에 대한 착각과 편견의 경계에 놓인 우리들에게 영화 ‘Mommy’는 서로가 서로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무미건조한 일상을 삶의 일부분으로 보게 만드는 ‘난해하지 않은’ 프랑스 영화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엄마가 되는 힘들다. 그 시도의 중심엔 언제나 ‘어머니(Mommy)’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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