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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nusual type/(2) Etc

영화 '경주' 멋대로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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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영화 '경주'의 포스터.





영화 '경주' 멋대로 파헤치기. 미장센과 몽타주 그리고 기억과 망상의 사이.

 

* 최대한 스포를 배제하려고 노력했지만, 의도치않게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 사실 이 작품 자체가 워낙 큰 틀에서 읽어지고 스포를 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개방적인 영화이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다.


용산가족공원 한켠에 놓인 커다란 화면, 창호지같은 순백의 공간에 작품이 뿌려지는 순간 모두 숨을 죽이고 한 곳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론적으로 영화는 '마법의 5분' 또는 '5분의 법칙'이라는 틀을 가지고 있는데, 영화가 시작되는 약 5분동안 영화의 방향, 흐름,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보여주고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가 접하는 영화 대부분이 이런 구조를 유지하고 가장 최적의 상태로 본다.

 


물론, 현대의 작가와 감독들은 이런 편견을 깨는 시도를 많이 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만 관객이 그 뜻을 따라가지 못해서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이젠슈타인'(1898-1948. 소위 '몽타주' 이론을 개발한 영화감독. 그의 업적은 가히 영화계를 재창조했다고 설명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그 적절한 예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러시아의 농민들과 자본계층의 갈등으로 일어난 파업이라는 주제로 '파업'(1925)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갈등으로 파업이 일어나고 그 과정을 노골적으로 그려낸 작품인데, 인상 깊은 것은 후반부에 노동자들이 군대를 향해 무작정 달려드는 장면과 교차적으로 '도축'(소를 도살하는 장면. 정말 노골적으로 나온다. 물론 16mm 흑백 무성영화지만, 지나치게 잔인하다.)하는 장면을 삽입하여 그 폭력성을 극대화시켰다.


그러나, 정작 에이젠슈타인의 이런 '계몽'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영화를 본 농민들은 도축되는 소를 보고 눈물을 흘리니는커녕 입맛을 다시며 전부 밖으로 나가 고기를 먹으러 갔다고 한다. 즉. 영화에 아무리 고풍스러운 철학 이론이나 감독의 제작의도가 담겨 있어도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 더 나아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무미건조한 하나의 씬(scene)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감독의 잘못된 판단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저 흥미수단으로 영화를 접하는 일부 관객들의 태도에도 책임이 있다. 영화는 단지 보는 것이 아닌 우리가 놓치는 것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시선이다.)


이처럼 틀을 깬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자칫 흥행을 포기하게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시도이다. 하지만, 경주는 초반부의 묘사를 조금 더 길게 잡아 이러한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관객들의 5분이라는 개념이 흐려져 영화가 표현하는 시간의 흐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작품에 담긴 미장센과 카메라 구도는 헐리우드에 익숙한 우리에게 굉장히 어색하고 어긋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오히려 동양적인 정서에 맞는 가장 동양적인 작업이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카메라가 특정 대상이나 사물을 포착한다는 것은 감독이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와 함께 관객의 눈을 그곳에 함께 두게하려는 일종의 '의도된 지연'을 유도한다.


예를 들어서 주인공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화면에 두명의 얼굴이 모두 나오거나 A/B로 나누어 교차된 장면 혹은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장면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경주는 이런 것과 달리 감독의 말처럼 "경주는 너무 아름답고, 만약 여기에 신민아같은 배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박해일(최현 역), 신민아(공윤희 역)를 비롯한 등장인물을 보여줄 때 항상 그 주변을 먼저 보여주고 그들을 따라가는 형식의 카메라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 즉, 단순한 배경 위에 등장인물들을 세워 놓은 것이 아닌 미장센(화면 구성의 미학, 그냥 쉽게 말해서 화면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에 등장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큰 틀에서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감독의 의도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경주에 놓여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무성영화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주변의 세밀하고 작은 소리를 그대로 담고 있는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일상이 영화, 영화가 일상이라는 작품 철학을 고스란히 받아드릴 수 있는 자세를 지닐 수 있도록 흥미를 이끌어준다. 


무의식적으로 들리는 삶의 소음들은 화면을 통해 여과없이 흘러나오는데, 이는 우리가 언제든지 박해일과 신민아의 위치와 그 역할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은 더듬거리는 기억으로 시작해서, 망상으로 맺어지는 듯한 것으로 달려가다가 다시 기억으로 끝이 난다. 애매모호하고 시간상의 구분이 없는 영화 속에서 관객들은 길을 잃거나 다른 곳으로 우회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데 감독은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공감할 수 있는 흥미요소(등장인물의 어설픈 모습이나 웃음을 줄 수 있는 요소들 등)를 배치하여 작품 속에 미아가 되지 않도록 굳은 노력을 했다.


극중 박해일은 '변태', '최고의 석학', '과거를 잊지 못하는 평범한 중년 남자.'등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내 자신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누울 때까지 하루종일 망상에 들떠있다.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씻고 밖으로 나가 걷고 듣고 이야기하는 모든 것 속에서 생각을 하고 혼자 망상을 하며 멋대로 지적인 유희를 즐긴다.


영화 '경주'는 이런 부분에서 어쩌면 우리가 박해일에게 큰 인상을 받았던 '은교'와 같은 정서와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서로만의 감정과 생각을 지닌 대상들이 어떤 교차점에서 만나 끌리고 엮이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은교는 조금 더 이 부분을 현실적으로 표현했기때문에 짓궃고 남성주관적이며 원초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온 것 아닐까.


 은교를 본 여성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성적 유희를 즐기게 만든 작품.' 또는 '한국 정서로 재해색된 롤리타.'로 여기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남성들의 느끼는 감정과 야릇하고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망상' 그리고 페티시즘을 자극하는 카메라 구도까지 완벽히 충족시킨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구조를 생각해보면, 영화 '경주'는 어쩌면 담고 있는 것보다 더욱 심오한 '정서적 간음'과 '육체적 간음'의 경계를 아주 세밀하고 가느다랗게 다루고 있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망상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수많은 사람과 스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우리는 유전자의 놀라운 생존/번식능력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을 훑어보고 읽기 시작한다.


간혹 유전자의 마음에 쏙 든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멋대로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 "저 사람의 손을 잡아보고 싶고, 귀를 만져보고 싶은." 경주의 포스터처럼 우리는 허락이 되지 않은 채로 멋대로 상대를 간음한다. 꼭 육체적인 접촉 뿐 아니라 그 대상과 함께 하고 이야기나누고 싶다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정서적 간음이 성립되는 것이다. 경주는 관람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이런 맥락에서 유지하는 것과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억과 망상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이 둘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완전히 다른 개념일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기억은 소비된 시간에 일어난 행위나 행동에 대해 인상깊은 것만을 단편적으로 지닌 후, 그것을 멋대로 왜곡해서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결국 기억은 또 하나의 망상과 왜곡을 통해 '사실'처럼 꾸며진 가상일 뿐이다.


영화 '라쇼몽'(1950)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진실은 정말 모호하고 일부로 전체를 파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환각이다. 모두가 한 사건을 보고 다르게 진술한다면, 그 공통된 부분만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만약 다른 기억과 혼선을 빚어 또 다른 망상을 입밖으로 꺼내 현실로 만든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영화 '경주'는 주변을 먼저 짚고 넘어가는 미장센과 등장인물의 모습보다 말과 행동, 사소한 손짓에 주목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우린 이미 경주에 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이 경주이며 경주가 곧 '나'다. 비록 나는 서울에 있지만, 이곳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경주가 된다. 경주에 가서도 서울에서 느꼈던 느낌과 추억, 그리움을 경험한다면 잠시라도 그곳이 서울이 된다.


박해일, 아니 우리 모두는 망상에 빠져 산다. 그 망상을 현실로 만드는 이들과 그냥 유희로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감독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하세요."라는 말을 라이브톡에서 가장 많이 했다는 지인의 말처럼 경주는 지역이나 물리적인 위치가 아닌 우리가 망상하고 생각하는 접촉하는 그 모든 것이라는 의도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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