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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ssay/(2) Document

박병학과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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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지혜 페이스북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온갖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최지혜, 본명 박병학이 죽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추모의 글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잘 죽었다고 글을 올리며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이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개를 때려서 죽인 여성 미용사의 행동을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정당화했고 군인은 잠재적 살인범이라는 실언과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단순히 '아저씨'가 나오므로 여성혐오 컨텐츠라고 말했던 기행이 나 말고도 여럿에게 회자되었나 보다.

 

난 저 사람의 논리나 얘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박병학은 최지혜라는 계정으로 인격모독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기도 했고, 내 댓글 일부를 캡쳐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출처 : 리얼뉴스

 

상당히 모욕적이고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단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들어보지도 못한 욕을 들어야 한다니 부당하다고 느꼈다.

 

이후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해 몇 번 항의했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차단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성소수자들이다. 생물학적인 성과 자신의 성적 지향성이 일치하지 않다는 이유로 최지혜에게 수모를 겪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논쟁이었다. 아니 논쟁이라고 하기엔 너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욕을 하고 비웃으며 상대에게 폭언을 퍼붓는데 그건 논쟁이라고 보기 힘든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그래서 난 최지혜, 박병학의 추모를 빌어주고 싶지 않다. 스티브 잡스와 이건희의 죽음을 추모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 허프포스트코리아

 

페미니즘 이론을 설파하던, 세상을 바꾸는 혁신적인 기술을 내세우던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어느 집단에겐 강력한 논리를 가진 희대의 페미니스트로 기억되겠지만, 나에겐 그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묵살하고 말과 글로 다양성을 짓밟은 폭력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추모하고 싶지 않다.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더라도 죽었으면 비판을 멈춰야 한다"거나 "그래도 죽었으니 추모를 받아야 한다는 말"은 비겁하다.

 

하지만 추모는 자유다. 추모를 하고 싶으면 추모를 하고, 비판을 하면 비판을 하면 된다. 그건 어려운 수학 공식도 아니고 이해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인 얘기도 아니다. 그저 자기 생각에 맞게 행동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여자라는 '가짜 성별'에 숨어서 남자라는 실제 성별을 감췄다는 비판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다. 먼저 우리는 최지혜부터 박병학으로 이어지는 모종의 가면놀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박병학의 가면은 최지혜라는 여성이었을 뿐, 애니메이션 사진이나 게임 캐릭터·연예인·인터넷 짤방·고정 닉네임·유동 IP 등 무엇이든 가면이 될 수 있다.

 

자기 셀카를 올렸어도 마찬가지다. 그 셀카는 자신이 남에게 보여지고 싶은 모습이 발현된 하나의 창작물(사진을 찍는다는 표현이 take a photo에서 make a photo로 바뀌고 있는 처럼)이다.

 

눈을 키우고 피부톤을 다듬고 턱을 줄여서 최대한 나의 본질과 다르게 만드는 이 행위가 가면이 아니면 무엇일까?

 

출처 : 리얼뉴스

 

결국 박병학은 자기 주장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성별을 내세웠던 것이다. 우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만큼 이 비판은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

 

또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인터넷 인격과 실제 인격이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숨고 숨기고 숨기기를 원하는 인터넷 문화 안에서 뭐가 진짜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뭐가 진짜 인격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익명성 안에 숨어서 남 놀리기를 즐기는 현실의 내성적인 나, 여고생이라고 소개했지만 실제론 30대 백수인 나,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했으나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나. 이 중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렇듯 가짜 성별에 숨어 비겁하다는 비판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한편으로는 여성 최지혜가 남성 박병학이었다는 사실이 페미니즘 담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다시 말해서 "남자 박병학이 남성혐오에 가까울 정도로 래디컬 페미니즘을 주장했는데, 남자가 남자를 혐오하다니 이 얼마나 웃긴 일이냐"는 거다.

 

일부 동의한다. 성별을 떠나서 모두 페미니스트가 될 수는 있지만, 남성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과 여성이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 리얼뉴스

난 지금까지 자칭 '남자 페미니스트'들을 여럿 만나왔다. 난 어느 누구에게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자기들이 먼저 남자 페미니스트끼리 친하게 지내자고 말을 걸어왔다.

 

그때마다 속으로 "페미니스트가 이렇게 쉽게 될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어느 분야의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기꾼인 것처럼, 나에게 남자 페미니스트라고 다가온 사람들 역시 정직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은 페미니즘 이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행동은 엉망이었다.

 

소개팅에 나가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환심을 사서 섹스를 얻어내는 사람부터 여러 여성 운동가들에게 접근해 금품을 갈취하는 사람, 이미 배우자가 있는 여성에게 같이 페미니즘 공부하자며 밤중에 자기 집으로 불러내는 사람,

또 페미니스트 연인이 있는데도 소개팅 어플로 여자친구를 구하는 사람, 자기는 여자를 좋아해서 페미니스트라는 사람, 여성 인권 의무화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가 연인을 폭행하는 사람까지 정말 다양한 남자 페미니스트들을 봐왔다.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574

 

광화문 민중총궐기 집회에 여성이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 - 여성신문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타고 여성혐오가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사상 최대 ‘100만 촛불시위’ 현장에서도, 풍자와 조롱이 오가는 온라인 공간에서도 여성들은 성범죄와 여

www.womennews.co.kr

 

그런 일들을 지속적으로 겪으면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박병학은 여성 최지혜로 페미니즘 글을 올리며 주목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고 비방했다.

 

난 그 사람이 얼마나 자기 삶에서 자기가 말한 대로 실천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 또 당사자성 역시 너무 어려운 얘기라 잘 모르겠다. 내가 그 개념들을 전부 이해하지 못해서 깊은 성찰이 어렵다.

 

다만 실수로 자기 '진짜 성별'이 드러났을 때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숨기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부분에서 그 사람을 신뢰할 수가 없다.

 

그렇게 거짓된 행동으로 남자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하고 수많은 갈등을 일으킨 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이건 명백한 최지혜의 잘못이자 박병학의 죽음과 별개로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왜 박병학에게 최지혜라는 가면이 필요했을까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당당하게 진짜 자기 모습으로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면, 애초부터 최지혜라는 제2의 인격이 필요하지 않았을 거다.

 

출처 : 리얼뉴스

이건 우리에게도 책임도 있다. 괴물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누구의 말처럼 사회를 통해 길러질 뿐이다.

 

결론적으로 가짜 성별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하거나 추모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도 박병학처럼 저마다의 최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성별이었을 뿐, 수많은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다.

 

최지혜-박병학에 대한 비판은 딱 거기까지다. 그 이상은 과하다고 생각한다. 난 여전히 그를 추모하지 않는다. 추모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모든 사람에겐 추모가 필요하다는 말 역시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아 저 사람 죽었구나'에서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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