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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nusual type/(1) Personality

매우 긴 학교 그리고 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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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불안하거나 뭔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학교에 간다. 딱히 누구를 만나거나 무슨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명문대를 나왔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낮아진 자존감을 다시 높여 보겠다는 원대한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전엔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편해서 그런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라 편하고 익숙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 익숙함에 자꾸 학교를 가게 된다.

 

출처 : 연세대학교 블로그

상당히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일이라 언제 가고, 얼마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감이다. 어느 날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버스를 탄다. 정문에 내린다. 그리고 학교를 돌아다닌다. 끝. 이게 전부다.

 

계획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계획이 있다고 말하기는 더 어려운 이상한 방문은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주로 수업을 들으러 다녔던 길을 걷는데 시간이 좀 많을 때는 자주 앉았던 벤치에 앉아 멍을 때리거나 빈 강의실에 들어가 매일 앉았던 구석진 창가 자리에서 감상에 빠지곤 한다.

 

개인적으로 정문에서 백양로를 지나 중앙도서관이 보이는 일직선 형태의 '관광용' 코스보다는 공학원 사잇길을 지나 대운동장을 끼고 과학관으로 올라가는 바깥쪽 코스를 더 좋아한다.

 

정문-백양로 코스는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고 사람들이 많아 부담스럽다. 학교 투어나 산책을 하러 오는 외부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코스라 더 식상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탁 트인 백양로는 너무 부담스럽다. 지금도 환한 대낮에 백양로를 걷고 있으면 무슨 벌을 받는 기분이다. 내가 걷는 모습을 모두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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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이라 패딩 입고 모자 쓰고 왔는데 짝사랑하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마구 샘솟는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성향 탓이다. 누가 내 뒤에서 걷고 있으면 내 걷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팔자걸음으로 보이면 어쩌지, 어깨가 늘어져서 기운이 없어 보이면 어떡하지, 일자로 잘 걷고 있는 거겠지 등 이것저것 신경 쓰고 있어서 예민해진 상태라 그렇다.

 

(그런데 왜 MBTI는 ENFP지?)

 

어쨌든 이런 괴상한 성향 때문에 줄곧 이상한 코스로 학교를 다녔다. 일자로 쭉 가면 되는데 굳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밖으로 나가는 묘한 방법이었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덕분에 학교의 구석구석을 알 수 있었다.

 

 

(중앙도서관-법대-신대-문대, 공학원-과학관-법대-신대-문대, 신대-문대-종합관-위당관 등)

 

그래도 이렇게 무계획적인 방문 안에서도 나름의 절차랄까, 일종의 일관된 코스가 있다. 바로 신학관이다.

 

신학관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학교 안에서도 가장 오래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우리 학교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신학관 지하 1층의 자판기와 인쇄실 그리고 묘한 적막이 떠오른다.

 

저기 보이는 빨간 의자와 ATM이 내 최애 자리였다. (출처 : 연세춘추)

신학관은 굉장히 찾기 어려운 곳에 있다. 법대와 문대를 가는 길 사이에 있고 언덕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높이에 있어 밖에서 잘 보이지 않아 모두 찾기 어려워 한다. 지도에서 봐도 그렇게 좋은 위치는 아니다.

 

그래서 신학관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여기가 신학관이냐고 꼭 묻는다. 지금은 입구에 큼지막하게 '원두우 신학관이'라고 써있어서 그런 일은 많이 줄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깔끔하게 바뀌었다. (출처 : 연세춘추)

학과 위상은 건물의 위치만큼 어중간하고 애매하다. 신학과는 기독교 대학의 정체성을 가진 핵심 전공이자 학교 설립 때부터 있던 가장 오래된 전공 중 하나인데 지금은 다른 학과로 가기 위한 발판으로 쓰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다른 전공보다 성적이 낮고 유입이 쉬어 그런 것 같다. 이 문제는 내가 입학했던 2011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는데 사람들이 자꾸 다른 학과로 빠져나가서 소속감이나 결속력이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따라서 지하 주차장까지 따로 있는 큰 건물인데도 항상 비어있었다. 20여 개가 넘는 강의실 중 절반에만 사람이 있었고 복도는 조용했다. 가끔 짐을 가지러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으나 금방 조용해졌다.

 

출처 : 연세춘추

그런데 난 이런 적당히 비어있는 느낌이 좋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공대처럼 한 학년에 200명이 넘는 학과가 부러웠으나 내 성향상 이게 맞았다. 적당히 복잡하고 적당히 한산한 느낌. 그래서 더 정이 갔다.

 

특히 누군가의 하품소리로도 모든 적막이 깨질 것 같은 묘한 긴장감이 좋았다. 또 실제로도 그렇게 조용했다. 신학관 지하 1층에는 동아리방, 중대형 강의실, 원우회실, 창고, 인쇄실가 있었는데 이걸 이어주는 큰 로비가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엔 구형 ATM과 학교 홍보영상이 나오는 TV, 낮은 탁자, 빨간 소파들이 있었는데 여기가 내 최애 자리였다.쉬는 시간이면 여기에 앉아 음료수를 마셨고 대충 멍 때리다가 다시 강의실로 돌아갔다.

 

과제가 없는 날에는 여기서 노트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은 내가 보고 싶으면 항상 신학관 지하 1층으로 왔다.

 

출처 : 데일리굿뉴스

두 번째로 좋아하는 자리는 지하 1층 학생회실이다. 여긴 뒤늦게 정을 붙인 곳인데 단과대학 학생회를 하며 알게 되었다. 회의를 하거나 각종 행사에 쓰이는 물품들을 정리하는 곳이라 외부인이 자주 오지 않는 아늑한 곳이었다.

 

도서관에 자리가 없으면 줄곧 여기서 공부했고 가끔 졸리면 긴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지금은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가기 때문에 가끔 그런 고요함과 잔잔함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이렇게 신학관까지 갔다오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재밌었던 일도 생각나고 보고 싶은 사람도 생각나서 걱정이나 근심이 싹 사라진다.

 

당장 해결할 일을 피해서 도망치는 느낌이라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가끔은 문제에서 멀리 떨어지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종종 이렇게 무작정 학교를 방문한다.

 

학생회관의 정면 모습. (출처 : 네이버 블로그)

그 밖에도 CC할 때 같이 공부를 했던 신중도 자리, 구중도 앞 흡연터, 신중도 입구 소파, 새벽 2시에 걸었던 백양로 공사장, 저녁 10시의 신학관 모습, 법대 지하 1층 매점, 학생회관 로비, 대운동장에서 과학관으로 가는 언덕길, 서문과 북문, 어떤 커플이 몰래 애정행위를 하고 있었던 신학관 뒷산 통로, 문대 연구실 등 기억나는 곳이 많다.

 

그래서 학교에 갈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지금은 철저히 외부인 신세라 찍을 수 있는 게 건물이나 풍경밖에 없어서 뭔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느낌이다. 학교 다닐 때 조금 더 많이 담아뒀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도 있다.

 

출처 : 연세대학교 홈페이지

작년에는 코로나로 학교에 자주 가질 못했다. 그나마 학교 선배나 후배들을 만나러 근처에 갔었는데 제대로 돌아다니지를 못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면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다. 내가 알던 공간들이 얼마나 바뀌었고 또 얼마나 그대로 남아있을지 기대된다. 열심히 구경하고 가막새에 가서 거하게 마셔야지.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장소에서 놀면 그게 행복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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