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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Unusual type/(2) Etc

나만의 켄터키 치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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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켄터키 치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죽은 왕녀를 위해 울리는 파반느 속에서 필자는 열아홉과 스무 살이라는 아슬아슬한 청춘의 경계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서로 각자의 삶, 아니 생활을 하던 그와 그녀 요한은 우연스럽게 한 곳에서 마주쳐 만남을 이어가고 누군가는 연인으로써, 또 다른 이는 친구로서 그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이라는 세 인물은 각자 다른 상황 속에 놓인 채로 지내왔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무의식에 가까운 기억은 또 다시 회상으로 현실 속에 덧입혀진다.


 그는 투박한 외모로 단역을 얻어가며 살아가던 허황된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미(美)의 희비를 겪게 된다. 반대로 그녀는 스스로가 희비의 정점에 놓여 인생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세상과 거리를 두며 지낸다. 요한은 그와 조금 다르게 화려한 배우였지만, 재벌의 첩이라는 소모품으로 살아간 어머니로부터 이런 인생의 양지를 경험하게 된다.


 후반부에 필자의 생각과 서술과정이 담긴 짧은 공간에서 독자는 미모, 더 나아가 ‘아름다움’으로만 평가되는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일련의 선언과 같은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와와, 예예”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의 문장은 권유나 회의가 아닌 의무적으로 선택해야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이것이 ‘사랑’으로 극복하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론으로 독자를 유도한다. 아름다움은 일종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부끄러움과 부러움”의 연속에 놓인 우리에게 수직적인 사랑이 아닌 수평적인 사랑을 목표로 삼으라고 꾸짖고 있다.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군만두’와는 다른 인물, 즉 독자는 필자의 말처럼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네오 아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앞서 효과적으로 배치된 세 인물을 통해 그 단상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일차원적인 결론이 아닌, 허물을 감싸고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최종적으로 달성해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보다 그렇게 보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또 다르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15만의 독자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선포를 이룬 이 작품의 등장하는 세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닌 현대사회의 청춘의 모습과 겹쳐져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그와 그녀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이루어지는 초반부의 회상은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하는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청춘은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아쉬운 시절이며 한번쯤 돌아가기를 원하는 이상향이 되어 영원히 맴돌게 된다. 


 하지만 열아홉과 스무 살은 마냥 아름다운 것이 아닌 그와 그녀의 관계처럼 서툴고 어색한 경직된 상태다. 남모를 시선이 느껴지고 그들의 말 한마디에도 위축되는 청춘은 그에게 미화된 기억일 뿐, 현실 속에 놓인 청춘의 모습은 아니다. 사실 청춘은 그 앞에 있는 그녀의 모습처럼 울고 낯설고 조심스러운 정돈되지 않는 상태이다. 기존에 경험하지 못했던 초현실적인 상황이 현실로 찾아온다. 청춘을 맞이한 세대는 그처럼 무덤덤하고 우리는 스스로 괜찮다며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마음속은 그녀처럼 여리고 불안정하다. 


 청춘은 지저분하지만, 아름답다. 여린 10대가 마저 매듭지어지지 않은 거추장스럽고 불규칙한 모습이다. 마치 버스 정류장에서 서로를 보내기 싫어한 그와 그녀처럼 우리는 지나간 청춘과 현실 속에서 그 끈을 놓기를 두려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 ‘청춘’이 탄 버스를 쉴 새없이 떠나보내고 있다.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은 청춘을 대변하는 뛰어난 “삼각형”으로 등장한다. 그와 그녀는 이제 막 청춘에 앞서 어리둥절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 일종의 사회적 유기를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빈번히 등장하는 요한은 그들에게 조언을 던지거나 함께 곁에 있으며 위로를 건넨다. 요한은 기성세대를 대변하는 또 하나의 극중 장치로서 그와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그들만의 ‘켄터키 치킨’이 되고 ‘HOPE’가 된다.


 하지만 요한도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다. 흠이 많고 때로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필자는 불안정하고 항상 자신의 자리를 이탈할 것 같은 불안정한 요소를 요한에게 부여함으로써 기성세대도 완벽한 답이 아니라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요한은 자살을 시도하여 병원에 입원하고 제 모습을 잃은 채로 지내게 된다. 이런 사건으로 그와 그녀는 또 다시 버림을 받고 홀로 서기를 시작하게 된다. 요한의 붕괴는 기성세대의 붕괴로 이어지며 진정한 ‘청춘’이 되는 시작을 알리는 시발점이 된다.


 기성세대는 잔디밭에 앉아 기타를 치고 취업과 진로보다 서로를 보듬어주고 감싸는 것이 청춘이라고 말한다. 이 세대는 요한처럼 그와 그녀의 위치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주입한다. ‘청춘은 아름답고 무엇이든 가능한 시기’ 또는 ‘서로 다투어 쌓아가는 스펙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를 갈구하는 것’이라는 보기 좋은 선전을 깊숙이 깔아놓는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말하는 청춘은 이미 지나간 청춘이며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만으로 과거와 현실이 융합될 수는 없다.


 극중에서 그가 그녀를 찾아가기 위해 무단한 노력을 하는 것처럼 청춘은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청춘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기성세대와 다른 세대에도 청춘은 있다. 비록 잔디밭과 올드 팝, ‘켄터키 치킨’이 없지만 그것들을 대변하는 그들만의 기억과 아픔, 그리움 그리고 사랑이 있다. 요한의 조언은 ‘꽤’ 유용하고 적절하지만, 그와 그녀처럼 그 조언을 비롯한 자신만의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보기 좋게 ‘군만두’가 되어 “와와, 예예”하는 상태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세 인물은 청춘을 지탱하는 삼각형인 것처럼, 그들이 파반느를 통해 보여주는 모습들은 현실을 지탱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앞서 말한 ‘네오 아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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